趙秋(1524-1606)이 월천서실(月川書室)의 개축 내력을 기록한 기문이 『월천집(月川集)』 4권(3책, 464면)에 실려 있다. 이 서실은 본래 조목(趙穆)의 부친이 1540년(중종 35)에 처음 기와와 초가를 섞어 지어 독서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 뒤 계속 보수하여 사용하다가 1590년(선조 23) 가을에 문과 장(堂)과 방(房)을 제대로 갖추고 동쪽 처마를 확장하여 장서각(藏書閣)을 넓히는 큰 공사를 하였다. 그리고 퇴계(退溪)가 쓴 ‘월천서당(月川書堂)’이라는 세 글자와 이묵재(李默齋, 이문건)가 쓴 ‘시재(是齋)’ 두 글자를 걸었다.
조목은 본래 책을 좋아하여 수많은 책을 모아 약 1,400여 권의 장서를 갖고 있었는데, 자식이 겨우 12살, 6살이라 그 책들을 제대로 읽고 보관할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서실을 보수하는 것에 관한 글을 남겼다. 수우당(修友堂) 김성일(金誠一)은 「향익동서원여제군범주방조사경어월천서사시이선생유고기합회어과운(向易東書院與諸君泛舟訪趙士敬於月川書舍時以先生遺稿會于課末云)」이라는 글을 『송암집(松巖集)』 4권(153면)에 남겼는데, 퇴계의 제자들이 조목의 월천서실에 모여서 『퇴계집(退溪集)』의 편찬을 논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유(金烋) 역시 「방월천서당(訪月川書堂)」(『경와집(敬窩集)』 10권, 257면)과 「방월천서당삼수(訪月川書堂三首)」(『경와집』 10권, 262면), 「월천서당증조주부(月川書堂贈趙主簿)」(『경와집』 10권, 275면)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모두 조목의 월천서실에서 지은 것이다.
천등산(天燈山)의 내력을 쓴 기문도 있다. 천등산은 안동부 서쪽 2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은 해배산(海背山)으로부터 여러 고을을 거쳐 봉정사(鳳停寺) 뒤쪽 산에서 다시 솟아난다.
고려의 태사(太師) 권행(權幸)은 이 산속에 장사지낸 지 600~700년이 지나 자손이 번성하였으나, 뒤에 장사지낸 이가 없어서 산이 황폐해지고 묘를 분별할 수 없었다. 조선 세종 연간에 권행의 18대손 평창군사(平昌郡事) 권옹(權雍)이 권행의 묘를 찾아내어 봉분을 쌓고 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자손들이 권행의 묘에 비갈(碑碣)을 세웠다.
이후 권옹의 사위 류유(柳沼) 부부가 묘를 관리하며 대대로 그 역할을 이어가게 되었다.重修書室記
趙秋(1524-1606)이 월천서실(月川書室)의 개축 내력을 기록한 기문이 『월천집(月川集)』 4권(3책, 464면)에 실려 있다. 이 서실은 본래 조목(趙穆)의 부친이 1540년(중종 35)에 처음 기와와 초가를 섞어 지어 독서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 뒤 계속 보수하여 사용하다가 1590년(선조 23) 가을에 문과 장(堂)과 방(房)을 제대로 갖추고 동쪽 처마를 확장하여 장서각(藏書閣)을 넓히는 큰 공사를 하였다. 그리고 퇴계(退溪)가 쓴 ‘월천서당(月川書堂)’이라는 세 글자와 이묵재(李默齋, 이문건)가 쓴 ‘시재(是齋)’ 두 글자를 걸었다.
조목은 본래 책을 좋아하여 수많은 책을 모아 약 1,400여 권의 장서를 갖고 있었는데, 자식이 겨우 12살, 6살이라 그 책들을 제대로 읽고 보관할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서실을 보수하는 것에 관한 글을 남겼다. 수우당(修友堂) 김성일(金誠一)은 「향익동서원여제군범주방조사경어월천서사시이선생유고기합회어과운(向易東書院與諸君泛舟訪趙士敬於月川書舍時以先生遺稿會于課末云)」이라는 글을 『송암집(松巖集)』 4권(153면)에 남겼는데, 퇴계의 제자들이 조목의 월천서실에 모여서 『퇴계집(退溪集)』의 편찬을 논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유(金烋) 역시 「방월천서당(訪月川書堂)」(『경와집(敬窩集)』 10권, 257면)과 「방월천서당삼수(訪月川書堂三首)」(『경와집』 10권, 262면), 「월천서당증조주부(月川書堂贈趙主簿)」(『경와집』 10권, 275면)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모두 조목의 월천서실에서 지은 것이다.
천등산(天燈山)의 내력을 쓴 기문도 있다. 천등산은 안동부 서쪽 2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은 해배산(海背山)으로부터 여러 고을을 거쳐 봉정사(鳳停寺) 뒤쪽 산에서 다시 솟아난다.
고려의 태사(太師) 권행(權幸)은 이 산속에 장사지낸 지 600~700년이 지나 자손이 번성하였으나, 뒤에 장사지낸 이가 없어서 산이 황폐해지고 묘를 분별할 수 없었다. 조선 세종 연간에 권행의 18대손 평창군사(平昌郡事) 권옹(權雍)이 권행의 묘를 찾아내어 봉분을 쌓고 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자손들이 권행의 묘에 비갈(碑碣)을 세웠다.
이후 권옹의 사위 류유(柳沼) 부부가 묘를 관리하며 대대로 그 역할을 이어가게 되었다.
